처음 만났을 때라는건 진작에 잊어버렸다. 언제부터 사이가 좋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째서 곁에 있는지를 생각해본 적도 거의 없다.
하지만 그런식으로 잘 알 수 없는 애매한 관계야말로 이상적인 친구관계가 아닐까. 의식해서 소중히 여기는 일 없이. 무의식중에 소중히 여기는. 단지, 의미도 이유도 묻는일 없이 한사람의 존재로서 존재할 뿐.
동인 서클 '우타게'의 4번째 작품 '클리어 레인'입니다.
보통 발매 당시엔 묻히더라도 이쯤되면 슬슬 수면 위로 올라오고들 하던데 아무래도 글러먹은듯. 으흑.
발매일이 꽤 지난 만큼 플레이를 시작한지는 좀 됐습니다만, 일부러 안하고 있긴 했습니다. 하면 왠지 지는 기분이 들어서...
그러다 1장 후반부 부터는 평소에 자주 하던 문어발 플레이를 완전히 치워버리고 이쪽에만 집중. 보통 야겜할때 같이 하는 마영전은 클리어 레인을 할때만큼은 아예 켜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3장~최종장 부분은 앞에서 말한것과는 다른 의미로 아껴서 했죠. 지금도 단편 소설은 아까워서 안 읽고 있는중. 분량도 얼마 안돼서...
이래저래 '아픈' 텍스트라는 부분에서는 앞서 했던 '키나나키의 숲'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다른점이라면 키나나키는 25세 이상의 사회인을 타겟으로 했다는 점이고, 이쪽은 현역 대학생을 타겟으로 했다는 점. '친구'라는 테마에서도 차이가 나긴 하는데 이쪽은 네타바레 요소가 조금 있는지라 일단 덮어두기로. 그러니까 키나나키 하시라니까요?
구성면에서도 조금 다른데, 키나나키가 1장 2장 3장 차례차례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3장에서 터트리는 반면에, 클리어 레인은 챕터마다 각각 다른 이야기로 구성이 되어 있어 한번씩 터트린 후에 최종장에서 마지막으로 뻥뻥뻥 터트리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한번에 터트리는 만큼 파괴력(?)만 보면 키나나키가 훨씬 높지 않나 싶은데, 이쪽도 키나나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텍스트와 연출, 음악 덕분에 최소한 최종장만큼은 키나나키에도 전혀 뒤쳐지지 않을 정도.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키나나키도 2장까지는 좀 미묘하긴 했죠. 특히 2장 초~중반부는 지루함의 끝을 보여주기도 했었고. 2장 후반부도 솔직히 미쳐 돌아가는거 구경하는 맛이었지 그거 말곤 딱히 별것도 없죠.
자,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하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 안에 몇명이나 되는 친구의 번호가 등록되어 있지? 가족은 당연히 제외하고. 거래처라던가 회사도 제외하고. 이름만 적혀 있고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서 단지 많아 보이게 하려고 등록되어 있는것도 제외를 하고. 상대방도 자신을 친구라고 생각할거라는 자신이 있는 번호만을 세어 보자고.
그리고. 그 결과에 의해 태어난 숫자가, 0인지, 1인지, 10인지, 100인지. 0이라면 그것은 고독한 것이며. 1이라면 그것은 귀중한 것이며. 10이라면 그것은 풍부한 것이며. 100이라면 그것은 지나친 것이겠지.
사람이 사람으로서 타인과 엮일 수 있는 시간에는 한계가 있어.
친구가 지나치게 적으면 관계를 잃고, 친구가 지나치게 많으면 시간을 잃지.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좋을 건 하나도 없어. 원액 그대로인 칼피스나, 물과도 같은 칼피스 따윌 누가 좋아서 마시겠냐구.
그래도 뭐, 내 입장에서 말해보자면.
수는 적으면 적을 수록 좋아.
하지만, 0만큼은 되고 싶지 않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건 누가 뭐래도 역시 2장. 최종장을 제외한 나머지 5장중에서도 가장 힘이 많이 들어간 부분이 2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도 그럴게 가장 중요한 테마인 '친구'가 메인 주제니까요. 그 밑으로는 1장>3장>4장>5장. 히키코모리 니트족도 나쁘진 않았는데 비슷한 소재를 이미 먼저 봐 버린게 가장 큰 원인이겠죠 역시.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 했지만 클리어 레인의 최대 장점은 '텍스트'입니다. 모씨 말마따나 별거 아닌 시나리오를 재밌게 써내는 텍스트는 상당히 귀한 물건이라고 보거든요. 상업에서는 도노이케가 가장 가까운 부류였지만 이젠 고인이고, 동인에서는 애초에 그런게 없었고...아니 있을지도 모르죠.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것 뿐이지.
텍스트 이외의 장점이라면 역시 음악. 최근의 많은 동인 게임들이 그렇듯 프리 소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총 3군데의 음악을 적절하게 조합해서 사용하는데, 이게 안 어울리는거 같으면서도 꽤 잘 어울리는게 특징 아닌 특징. 그나저나 곡 이름이 나오질 않으니 자세히 이야기 하긴 힘들고...가장 기억에 남는 곡이라면 아무래도 역시 스탭롤 직전에 카스미의 독백과 같이 나오는 그 곡.
○월 X일 지금, 난, 행복합니다.
가장 아쉬운 점이라면 역시 오/탈자가 심각한 수준으로 눈에 자주 띈다는 점. 여기에 추가로 스크립팅 미스로 명령어가 대사와 같이 출력되는 경우도 종종 있곤 합니다. 단순 비쥬얼 노벨 타입이 아니라 일반적인 대화씬을 말풍선으로 처리하는 등의 연출로 스크립팅 하기 힘든건 이해하겠는데(거기다 원화까지 합쳐서 2인 제작이고) 이제 슬슬 패치쯤은 내도 괜찮지 않나염. 원화야 원래 동인 게임 할때는 거의 신경 안쓰는 부분이라 이정도면 불만 없이 OK. 그리고 감상 모드가 아예 없는 것도 좀 아쉽긴 아쉬운 부분. CG는 그렇다 치고 음악 강상은 꼭 넣었으면 좋았을텐데 말입니다. 미친듯이 뒤지면 따로 구할 순 있겠지만.
아무튼 2011년에 발매된 동인 게임들 중에선 틀림없이 탑 클래스의 작품이었고, 개인적으로도 지금까지 해온 동인 게임들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는 가볍게 들어갈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다음 작품이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나온다면 분명히 플레이 할 듯.